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SK 와이번스/역사 (문단 편집) == [[강병철]] 감독 체제 (2000~2002) 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62031310.2.jpg|width=100%]]}}} || [[롯데 자이언츠]]에서 두 차례 우승을 맛봤던 베테랑 지도자 [[강병철]] 감독의 지도 아래 새롭게 창단된 팀이었지만 창단 첫 해 SK에 대한 전망은 매우 비관적이었다. 개별 계약 과정으로 선수단을 재편했지만 누더기처럼 헐거워진[* 해체 당시 쌍방울 선수단은 정상적인 1군 선수단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. 구단 운영난의 여파로 [[김기태(1969)|김기태]], [[조규제]], [[박경완]], [[김현욱(야구)|김현욱]] 등 주축 선수들이 거액의 현금을 받는 조건으로 부자 구단에 팔려나갔고 주전 선수들의 잇단 이탈에 기존 선수들도 크게 동요했다. 여기에 팀의 젊은 주포였던 [[심성보]]는 이 무렵부터 지병인 [[당뇨병]]의 여파로 기량 쇠퇴의 비운을 맞게 된다.] 옛 쌍방울 선수단 대부분을 그대로 흡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1년 전 시즌 97패를 찍었던 옛 쌍방울의 전력과 큰 차이가 없었다. 더구나 신생팀 전력 지원의 일환으로 각 구단이 보낸 선수들도 전력 증강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. 결국 시즌 초반부터 독보적이고 압도적인 꼴찌를 달려야 했다. 쌍방울과 계약했던 외국인 선수들도[* SK 최초의 외국인 선수 중 한 명이 훗날 [[네덜란드 야구 국가대표팀]] 감독이 되는 [[헨슬리 뮬렌]]이다.] 기량을 보고 영입했다기 보다는 그저 싼 값에 데려온 선수의 경향이 강했던 만큼 전반기 도중 외국인 선수 전원을 교체했고[* 이 당시 데려온 선수 중 한 명이 삼성의 [[2002년 한국시리즈]] 우승 주역 중 한 명인 [[틸슨 브리또]]였다.] 인천 연고팀으로서의 이미지 정착을 위해 자타공인 인천야구의 슈퍼스타로 불리던 [[김경기]]를 현대로부터 데려오고 미완의 대기였던 [[이호준]]을 [[해태 타이거즈]]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등 각고의 노력도 했다. 그래도 창단 첫 해 꼴찌의 수모는 벗어나지 못했다. 2000년에 세운 시즌 44승과 0.338의 시즌 승률은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최악의 시즌 기록이다.[* 창단 이후 최악의 시즌으로 전락한 2020년에 하마터면 이 기록을 깰 뻔했다. 시즌 최소승 기록과 최저승률 기록은 남아 있지만 최다패 기록(86패→92패)은 2020년에 경신하고 말았다.] 처참했던 팀 성적만큼이나 고역스러웠던 것은 지역민들의 철저한 무관심과 냉대였다. 프로 원년인 1982년 [[삼미 슈퍼스타즈]] 시절부터 인천 연고팀으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던 현대의 [[연고지 이전]]은 인천지역 야구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. 1군 엔트리는 물론 코칭스태프까지 [[인천고등학교 야구부|인천고]], [[동산고등학교 야구부|동산고]], [[제물포고등학교 야구부|제물포고]] 등 인천지역 학교 출신 인사가 즐비했던 팀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리고 직전 해까지 회색 유니폼을 입고 인천에 원정을 왔던 전북 출신의 옛 쌍방울 선수들을 홈팀으로 맞이하자니 팬들 입장에서는 [[멘탈 붕괴]]가 아닐 수 없었다. 결국 이 당시 인천의 야구팬들은 낯익은 선수단을 따라 현대를 응원하는 팬, 낯설지만 그래도 인천의 새 식구가 된 SK를 응원하는 팬, 그리고 아예 '''야구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린 팬'''으로 나뉘었다. 그 결과 창단 첫 해였던 2000년 한 해 동안 [[숭의야구장]]을 찾은 총 관중 수는 고작 8만4563명에 불과했다. 이는 경기당 평균 1281명으로 숭의야구장 좌석 점유율이 10% 남짓에 불과한 것이었다. 괜히 인천 팬들이 현대에서 잉여자원으로 전락한 왕년의 4번 타자 [[김경기]]라도 받아오라고 구단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다. 창단 2년차였던 2001년에는 LG와의 개막전에서 창단 첫 [[숭의야구장]] 홈경기 만원사례를 기록하고 그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산뜻하게 출발했지만 그래도 2000년과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 전력 앞에 절망해야 했다. 그나마 외국인 투수 [[틸슨 브리또]]가 발군의 실력으로 타선을 이끌었고 외국인 선발투수 [[페르난도 에르난데스]]가 선발로만 무려 233이닝을 던지는 괴력~~과 혹사~~피칭을 선보였지만 그게 전부였다. 그래도 1년 전보다는 전력이 조금 나아졌고 리그 수준이 전반적으로 평준화된데다[* 이 당시 4위 [[한화 이글스]]와 최하위 [[롯데 자이언츠]]의 승차가 불과 2경기였다.] 롯데가 ~~[[8888577]]의 서막을 여는~~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. 다만 명목상 순위에서 롯데에 1계단 앞서는 7위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공동 꼴찌나 다름없었다. SK가 롯데보다 1승을 더하고 롯데가 4무를 한 탓에 승차 없이 승률에서 SK가 0.001 (1리) 앞서면서 7위를 했다. 세 번째 시즌인 2002년은 확실한 변화의 해였다. 1982년부터 30년간 인천 연고팀의 홈구장으로 쓰였던 낡고 좁은 [[숭의야구장]]을 벗어나 당시 [[KBO 리그]]의 최신식 경기장으로 각광을 받던 [[인천 SSG 랜더스필드|문학야구장]]으로 홈구장을 옮겼기 때문이다. [[한화 이글스]]와의 시즌 홈 개막전에서 인천야구 사상 최초로 단일 경기 입장 관중수가 2만명을 넘어섰고 1년 내내 새 구장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[* 문학야구장이 [[문학경기장역]] 인근에 있다는 점을 내세워 [[인천교통공사|인천지하철공사]] 측과 공동 마케팅에 나서는 한편 동인천, 주안, 부평 등 인천지역 주요 부도심 지역과 야구장을 잇는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등 팬들의 야구장 접근성을 높이는데 노력했다.] 창단 첫 해 한 시즌 누적 관중의 5배에 육박하는 관중 증가세를 기록하며 1996년 이후 6년 만에 인천 연고팀 시즌 홈 관중 40만명 시대를 다시 열게 된다. ~~[[SK 와이번스/유니폼#s-2.3|그리고 유니폼도 과감히 바꿨다가 욕을 거하게 먹고 말았다.]]~~ 선수단 전력에도 변화를 줬다. 구단 창단 이후 최초의 외부 FA 영입으로 내야수 [[김민재(내야수)|김민재]]를 영입했고 쌍방울 시절부터 전천후 좌완으로 뛰었던 [[오상민]]과 팀 내야진의 주축인 [[틸슨 브리또]]를 삼성에 내주고 과거 쌍방울 시절 락커룸 리더였던 [[김기태(1969)|김기태]], 베테랑 포수 [[김동수(야구)|김동수]], 인천 출신 2루수 [[정경배]], 과거 OB의 에이스였던 [[김상진(1970)|김상진]], 경험 많은 좌완 [[김태한]], 우완 유망주 [[이용훈(야구)|이용훈]]을 받아오는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된다. 다만 이 중에서도 SK에서 그럭저럭 굵직한 활약을 펼친 선수는 2009년까지 멤버로 뛰었던 [[정경배]]나 현역 말년을 불태운 [[김기태(1969)|김기태]] 정도 뿐이다. 김동수는 1년 뒤 현대로 이적해 친정팀에 비수를 꽂았고[* 당시 새 감독으로 취임한 조범현과는 삼성 시절부터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평이 있다.] 김태한과 김상진은 2003년을 끝으로 은퇴했으며[* 그나마 김상진은 은퇴 후 SK에서 코치로 일하면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.] 이용훈은 부상으로 신음하다 고향팀 롯데로 트레이드된다. 이러한 변화에도 선수단 내에 뿌리 깊게 박힌 [[패배주의]]와 팬들의 거듭된 냉대에 부딪혀[* 40만명 이상의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 모았지만 어디까지나 새 구장 개장에 대한 효과로 관중이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. 여전히 인천지역에서 "우리 지역 연고팀은 어디인가"를 꼽는 질문에서 SK는 단 한 번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. 실제로 이 시절 SK 응원석보다는 [[KIA 타이거즈]], [[한화 이글스]], [[LG 트윈스]] 등 인기 원정팀 응원석의 관중이 더 많은 날이 부지기수였고 [[2002 FIFA 월드컵 한국·일본|한일 월드컵]]의 여파로 야구 인기 자체가 바닥으로 추락했기에 SK에 대한 인천 팬들의 관심은 여전히 차가웠다고 볼 수 있다.] 결국 또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다. 그나마 2001년보다 1계단 올라간 6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[[강병철]] 감독이 계약 기간을 1년 남겨둔 시점에서 사퇴하게 된다. [[강병철]] 감독이 재임했던 3시즌은 창단 후 단 한 시즌도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했고 줄곧 하위권에 머물렀기 때문에 구단 역사에서 흑역사로 치부될 수 있는 기간일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구단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. 구단 고위층에서 애초부터 옛 쌍방울의 색채를 지우고자 했던 만큼 쌍방울의 전력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데 성공했다. 물론 [[김원형]], [[최태원(야구)|최태원]], [[조원우(야구)|조원우]] 등 쌍방울의 주축 선수 일부는 여전히 SK에서 활약했지만 이들마저도 없었다면 SK의 초창기는 더 암울했을 지도 모른다. 그래도 강병철 감독 재임 시기의 가장 큰 성과를 꼽는다면 어린 선수들의 성장이다. [[강병철의 양아들]]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린 선수들을 지나치게 중용하던 그의 용병술은 SK 시절에도 여전했다. 그 결과 쌍방울의 마지막 1차지명 신인이던 [[이진영]]을 주축 타자로 성장시켰고 해태에서 온 [[이호준]]을 팀의 굳건한 4번타자로 각성시켰으며 [[채종범]]을 붙박이 주전 외야수로 성장시키는 등의 성과를 냈다. 실제로 [[이진영]]과 [[이호준]]은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했고 [[채종범]] 역시 SK 초창기 시절 없어서는 안될 핵심 전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. 물론 과오도 있었다. [[강병철]]의 대표적 과오로 꼽히는 [[투수]] [[혹사]]. [[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|군산상고]] 에이스 출신으로 창단 첫 해 SK 마운드의 유일한 희망이자 SK 초대 에이스였던 [[이승호(1981)|이승호]]를 [[살려조|선발, 중간, 마무리 할 것 없이 무지막지하게 굴렸고]][* 강병철의 재임기였던 3년간 투구이닝이 무려 503이닝에 이른다. 특히 2001년에는 무려 220⅔이닝을 소화하며 14승을 따냈지만 이 때의 혹사가 이승호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고 만다.] 외국인 에이스였던 [[페르난도 에르난데스]]의 어깨를 있는대로 갈아버렸으며 감독 재임 마지막 해에 입단한 신인 투수 [[채병용]]을 51경기 141이닝동안 투입하는 혹사를 자행한다. 결국 이승호와 채병용은 부상에 신음해야 했고 에르난데스는 얼마 못 가서 결국 선수 생활을 접게 된다. 또 어린 선수들을 중용한 나머지 베테랑 선수들을 괄시한 것도 강병철 시대의 과오라면 과오다. KBO 리그 사상 최초로 1000경기 이상의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운 철인 [[최태원(야구)|최태원]]의 연속 출장 기록을 중단시켰고 연고지 인천의 슈퍼스타인 [[김경기]]를 사실상 떠밀어서 은퇴시킨 것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무시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